대중에게 가장 익숙한 양자 비유를 도마 위에 올려 슈뢰딩거 고양이로 양자컴퓨터를 설명하면 왜 틀리는지를 하나씩 짚어 보겠다.

원래는 이해가 아니라 비판을 위해 만든 사고실험이었다
많은 사람이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양자 세계를 친절하게 소개해 주는 비유로 기억하지만, 그 출발점은 정반대였다는 사실부터 짚어야 한다. 슈뢰딩거는 상자 속 고양이가 살아 있으면서 동시에 죽어 있다는 결론이 얼마나 터무니없게 들리는지를 일부러 극단까지 끌고 가, 미시 세계의 중첩을 곧이곧대로 거시 세계에 확장하면 상식이 무너진다는 점을 꼬집으려 했다. 다시 말해 이 이야기는 이해를 돕는 다리로 지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해석이 품은 불편함을 드러내려고 던진 반문에 가까웠다. 아주 작은 알갱이의 붕괴 여부에 고양이의 생사를 사슬처럼 묶어 놓으면, 미시 세계의 애매함이 눈에 보이는 짐승에게로 그대로 번져 버린다는 역설을 겨눈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며 이 비판의 도구가 오히려 양자 세계를 소개하는 대표 이미지로 굳어졌고, 원래의 날 선 문제 제기는 사라진 채 고양이의 기이함만 남았다. 그 결과 우리는 발명가가 부수려고 세운 허수아비를 정답인 양 물려받은 셈이 되었다.
사고실험의 맥락을 지운 채 그림만 취하면, 슈뢰딩거가 지적하려 한 바로 그 오해를 우리 스스로 반복하게 된다. 애초에 비판을 위해 과장된 장치였으니, 그것을 교육용 비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한 걸음 어긋난 자리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셈이다. 좋은 소개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야 하는데, 이 비유는 태생이 조롱에 가까운 확대경이라 그 왜곡을 물려받을 수밖에 없다. 무엇을 부수려고 만든 도구를 무엇을 세우는 데 쓰려 하니, 뿌리에서부터 어긋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슈뢰딩거 본인조차 이 사고실험을 자랑거리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을 곤혹스럽게 하는 골칫거리로 소개했다는 사실이다. 그가 겨눈 과녁은 고양이가 아니라 미시와 거시를 잇는 사슬이 만들어 내는 논리적 불편함이었고, 고양이는 그 불편함을 눈앞에 들이밀기 위해 동원된 극적인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소품인 고양이만 기억하고 과녁이었던 불편함은 잊었으니, 원래 이야기가 던진 질문과 정반대의 교훈을 얻고 만 셈이다. 비판의 화살을 감탄의 삽화로 오독하는 이 뒤바뀜이야말로, 이 비유를 교육의 첫 자리에 두면 안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다. 그러니 이 비유가 널리 퍼졌다는 사실 자체가 곧 정확하다는 보증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우리가 원래 의도를 잊었다는 증거에 가깝다.
삶과 죽음의 그림이 가려 버리는 진짜 알맹이
대중이 이 비유에서 건져 올리는 문장은 대개 하나로 압축된다. 고양이가 삶과 죽음을 동시에 지닌다는 것, 곧 중첩이란 두 상태가 나란히 존재하는 일이라는 이해다.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양자컴퓨팅의 핵심이 통째로 미끄러져 나간다. 하나의 정보 알갱이가 지니는 중첩은 그저 두 가지가 함께 있다는 정적인 그림이 아니라, 각 가능성마다 크기와 방향을 함께 지닌 값이 얹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값은 단순한 확률이 아니라 크기와 회전의 위치를 동시에 품은 양으로, 흔히 진폭이라 부르며 두 개의 실수를 짝지어 하나로 다루는 복소수로 표현된다. 여기에는 위상이라 불리는 방향 정보가 들어 있어서, 같은 확률이라도 서로 어긋난 방향으로 서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진다. 예컨대 두 갈래가 같은 확률을 지녀도 방향이 마주 서느냐 나란히 서느냐에 따라 하나는 사라지고 다른 하나는 두 배로 자라날 수 있는데, 이 미묘한 차이가 계산의 승패를 가른다.
그런데 고양이 그림은 살았다와 죽었다라는 두 칸만 보여 줄 뿐, 그 각각에 실린 크기와 방향은 어디에도 담지 못한다. 삶과 죽음이라는 이분법은 위상이라는 세 번째 축을 통째로 지워 버리고, 오직 있다와 없다의 평면으로 세계를 눌러 버린다. 그래서 이 비유만 붙잡으면 중첩을 두 개가 겹쳐 있다는 수집품 목록처럼 여기게 되고, 방향을 지닌 값들이 살아 움직인다는 감각은 영영 들어오지 못한다. 확률만 남고 위상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왜 어떤 계산이 다른 계산보다 압도적으로 빠른지 결코 설명할 길이 없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정보 알갱이 하나의 상태는 살았다와 죽었다에 얹힌 두 진폭이 이루는 넓은 무대 위의 한 점으로 그려지는데, 이 무대는 단순한 두 칸짜리 선택지가 아니라 방향까지 품은 둥근 공간에 가깝다. 고양이 그림은 이 둥근 무대를 양 끝의 두 점으로 납작하게 눌러 버려, 그 사이에 펼쳐진 무수한 중간 방향을 모조리 지워 버린다. 바로 그 중간 방향들의 회전과 어긋남이 계산의 재료인데, 삶과 죽음이라는 흑백 대비는 이 색색의 스펙트럼을 두 극단으로만 뭉개는 것이다. 그래서 이 비유에 오래 머물수록 우리는 양자를 그저 확률 놀음으로 여기게 되고, 방향이라는 감춰진 차원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알맹이가 빠진 껍데기를 정답으로 착각하게 되며,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눈을 감은 채 다 이해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간섭과 얽힘, 그리고 무너지는 자리를 함께 말해야 하는 이유
정보 알갱이 연산이 지닌 힘은 바로 그 방향을 지닌 값들이 서로 겹쳐 물결처럼 간섭한다는 데 있다. 여러 갈래의 계산 경로가 동시에 진행되다가, 틀린 답으로 이어지는 방향들은 서로 반대로 서서 상쇄되고 정답으로 모이는 방향들은 나란히 서서 커지도록 설계하는 것이 양자 계산의 참된 요령이다. 즉 답은 무수한 가능성 가운데 우연히 뽑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난 것을 지우고 맞는 것을 키우는 물결의 조율을 통해 남는다. 고양이 비유는 삶과 죽음의 확률만 이야기할 뿐 이 상쇄와 보강의 무대를 전혀 마련하지 못하니, 정작 왜 빠른지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완전히 침묵한다. 물결이 없으니 상쇄도 보강도 없고, 그러니 계산이라는 사건 자체가 그림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상자를 열어 확인하는 순간 중첩은 무너져 오직 한 결과만 남는데, 이 붕괴 역시 그림 속 고양이 한 마리로는 왜 방향 정보가 사라지고 하나로 정해지는지 보여 주지 못한다. 측정 전까지 존재하던 풍부한 방향의 세계가 확인과 동시에 단 하나의 답으로 접혀 버린다는 사실은, 살았다 죽었다를 뒤집는 것과는 결이 전혀 다른 사건이다. 더 결정적으로, 두 알갱이가 서로 묶여 한쪽을 확인하면 다른 쪽 운명이 즉시 정해지는 얽힘은 고양이 한 마리 이야기로는 아예 손댈 수조차 없다. 상관이라는 관계는 둘 이상의 주인공을 요구하는데, 외로운 고양이에게는 짝이 없기 때문이다. 얽힘이야말로 양자 계산의 진짜 자원인데, 비유는 그 방으로 통하는 문조차 열어 주지 못한다. 두 알갱이가 얽히면 각자를 따로 떼어 살았다 죽었다로 말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오직 둘 사이의 관계로만 상태가 규정되는데, 이 대목은 한 마리 고양이를 아무리 오래 들여다봐도 결코 떠오르지 않는 그림이다. 정리하자면 고양이 비유가 침묵하는 자리는 하나가 아니라 셋이다. 방향을 지닌 값들이 물결처럼 간섭한다는 사실, 확인하는 순간 그 풍요가 하나로 접혀 무너진다는 사실, 그리고 여럿이 묶여 나뉠 수 없는 운명을 이룬다는 사실이 그것인데, 하필 이 셋이 양자 계산을 양자 계산답게 만드는 바로 그 심장부다. 심장부를 통째로 비워 둔 비유가 어떻게 대상을 소개했다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비유란 직관으로 오르는 사다리일 뿐, 어느 높이에서는 반드시 발판이 끊긴다. 그러니 좋은 비유가 되려면 어디까지 데려다주고 어디서 무너지는지를 함께 일러 주어야 하며, 그 무너지는 자리를 침묵으로 덮는 순간 비유는 이해의 다리가 아니라 오해의 씨앗이 되며, 우리는 사다리 끝에서 허공을 딛고도 정상에 올랐다고 착각하게 된다.